▽ 화령재에 있는 정자 화령정까지 가야는데 아스팔트 길을 갈 필요가 없어 아니가고 2013년 백두대간 종주시 잡았던 화령정 정자를 이곳에 실어보며 치열했던 화령잔 전투에 대한 소개를 하자꾸나.

▽ 이곳은 6.25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였다.
화령장 전투?
6.25가 발발한지 22일
파죽지세로 밀려오는 북한군은 불과 사흘만에 서울을 수중에 넣고 대전에서 미 24사단을 궤멸시기며 8.15 이전까지 부산까지 점령한 후 전쟁을 끝내겠다는 계획을 순조로이 진행하고 있었다.
대세는 그렇게 기울어져 가는 듯했다.
지연작전을 감행하던 아군은 동락리 전투(7.7)와 이곳 화령장 전투(7.17)에서 적의 선봉대를 무력화시키며 낙동강 방어선 구축의 시간을 번다.
상곡리 전투와 동락리 전투를 합하여 화령장 전투라고 전사에 기록하고 있는데 이 전투에서 아군은 매복작전을 펼쳐 적을 무력화시킨다.
북한 15사단에 맞서 싸웠던 17연대(연대장 백인엽 : 그는 부상으로 참전하지 못하고) 부연대장 김희준 중령의 지휘하에 북한 15사단을 궤멸시킴으로서 그들의 작전계획을 좌절시킨다.

▽ 그런데 6.25 전쟁시 아군이 거둔 최초의 쾌거를 이룬 승전보는 동막리 전투이다.
동막리 전투에는 드라마같은 얘기가 펼쳐진다.
전쟁초기 아군은 처음보는 괴물 적 전차에 속수무책 당하기만 했다.
소총으로 전차를 공격도 해보고 수류탄을 투척도 했지만 전차는 꿈쩍도 않고 다가오고 있었다.
7월 7일 6사단 7연대 2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부용산 방어의 임무를 부여받고 부용산으로 이동중 어떤 처녀 선생으로부터 동막 국민학교에 인민군이 주둔해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다.
그는 방어임무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부용산으로 이동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에게 국군은 이미 철수하여 이곳에 없다는 거짓 정보를 흘려 그들이 방심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길 수 있는 전투를 외면하려 하는냐는 그 선생의 날카로운 지적에 마음을 바꾸어 방심하고 있는 적의 허점을 찌르는 기습작전을 감행한다.
아! 독막리 전투 또는 무극리 전투라고 부르는 이 기습작전에서 김종수 대대는 다음과 같은 전과를 기록한다.
사살 2186명, 포로 132명, 노획장비 곡사포 6문, 76미리 곡사포 4문, 직사포 7문, 12.7미리 중기관총 6정, 장갑차 4량, 2 1/2톤 차량 60대, 1/4턴 찦차 15대 사이드 카 7대....
그런데 아군의 피해는 4명이 전사하는데 불과했다.
그리고 북한 15사단은 다시 2주일 후 화령장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김일성으로 부터 최약체 사단으로 평가받고 지휘관이 문책당하는 사태에 직면한다.
그런데 대승을 걷을 수 있는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했던 사람은 동막국민학교에 발령받고 얼마 되지 않은 김재옥이란 여교사였다.
그로부터 10여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날...
1963년 신문지상에 대서특필되었던 고재봉 도끼만행 사건이 있었다.
고재봉은 자신의 상관이었던 박중령 때문에 교도소 신세를 지게된다.
교도소 생활이 끝난 후 그는 도끼를 들고 박중령 관사로 쳐들어가 일가족 6명을 처참하게 살해한다.
아뿔사 그런데 박중령은 다른 곳으로 전출을 갔고 그 후임 대대장으로 이덕주 중령이 그곳에 살고 있었다.
이덕주 중령의 부인이 바로 동막리 전투의 영웅 김재옥 여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람들은 더욱 애통해했다.
정부는 김재옥 교사에게 2012년 10월 보국훈장을 수여했고 2013년 8월의 6.25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김재옥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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