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나만의 사모곡

킹라스트(kingrast) 2011. 10. 6. 21:49

 

 

             - 나만의 사모곡 -

고향을 떠나봐야 고향의 그리움을 느끼고

조국을 떠나봐야 애국심이 상승된다.

부모님 살아실땐 느끼지 못하지만

돌아가시고 안계시면 그때서야 후회한다.

 

팔남매를 낳으시고 기르시니 그 얼마나 대견하신가.

내 기억속엔 엄마는 없고 어머님 뿐이다.

어릴적 어머니는 대단히 엄격하셨다.

 

어느 겨울날 사촌형의 꼬임에 어머님 전대에서 돈을  꺼내 사탕을 사먹고 집에 늦게 들어갔는데

어머님께서 나의 옷을 모두 벗기시고 밖으로 내모시는 엄한 벌을 내리셨다.

 

쫒겨난 나는 그 사촌형과 동네 어느 볏단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밤을 지새게 되었고 볏단속이라 하더라도 한겨울의 한파는 온몸에 파고들었다.

한밤중 오들오들 떨고 있을때 어머님께서 찾아 오셨다. 쫓아낸 아들이 걱정스러워 밤새워 찾았으리라....

 

어머님 손에 이끌려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지만 나 자신 어린나이이지만 큰 잘못을 하였음을 깨닳게된 계기가 되었다.

 

12세에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8남매를 나으시고 기르시게된 어머님의 젊은 시절은 당시 상황에 따라 충분히 상상이된다.

 

일제시대의 수탈에 없는 재산모두 빼았기고, 해방되어 살만할 지음 6.25라는 한국전쟁이 발발하게되니 이때부터의 삶의 역경이 어떠하였겠는가?

 

내나이 4-5세때 일거라고 생각되지만 아직도 내기억에 6.25는 나에게도 시련이었다고 생각한다. 당시 우리집 뒤뜰에는 커다란 땅굴이 있었는데 하늘에 비행기가 왱왱거리고 지나갈때면 집안의 모든식구가 이 땅굴로 숨어들곤하였다.

 

그때마다 어머님께서는 비행기 소음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감자며 고구마 등을 삶아오시곤 하였다.

뿐만아니라 춘궁기에는 집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변산의 바다며 산으로 먹을것을 구하기 위해 먼 거리를 다녀오신곤 하였다.

 

8남매를 모두 시집장가 보낼때는 아버님보다도 어머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서 각종 복잡한 문제 등을 손수해결하시고 귀여운 손자를 보실때쯤에는 이미 심신이 늙고 찌들어 있었다.

 

10여년전  아버지를 먼저 보내시고 혼자되시어 8남매의 아들/손자들과 행복을 누리고 살만할때는 지병인 관절이 약화되어 활동이 부자연 스럽게 되고 기본활동이 제약됨에 따라 요양원에 모실 수 밖에 없었다. 요양원에 입원하신 3-4년동안 가족을 떠나 요양원에 있어야만 하는 어머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이제와 생각해보니 어머님 께서는 전 생을 바쳐 자식들에게 헌신만 하시다가 한세상을 살다가신 분으로 기억될 뿐이다.

 

오늘이 어머님 기일이다.

 

제사를 지내는 내내 요양원에서 하루하루 야위어가시는 어머님의 얼굴이 자꾸만 떠오른다.

어머님 제사 준비...

이번 제사에는 8남매 모두가 참석하였다.